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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랍 깊숙한 곳에서 나온 맥가이버 칼을 다시 꺼내보며

서랍 속에서 잠자던 물건의 발견

주말에 큰맘 먹고 다용도실 정리를 시작했다. 정말이지 왜 이렇게 살면서 버리지 못하는 물건들이 많은 건지 모르겠다. 한참을 낑낑대며 짐을 옮기다 보니, 아주 오래전에 등산 간다고 샀던 빅토리녹스 칼이 서랍 구석에서 튀어나왔다. 예전에는 이걸 허리에 차거나 가방에 매달고 다니면 괜히 든든한 기분이 들곤 했다. 지금 보면 뭐 대단한 기능이 있는 것도 아닌데, 그때는 이게 무슨 만능 도구라도 된 것처럼 소중하게 챙겼던 기억이 난다. 대략 5만 원 정도 주고 샀던 것 같은데, 요즘은 이런 걸 쓸 일이 거의 없다. 가끔 택배 상자 뜯을 때나 조잡한 나사를 조일 때 빼고는 말이다. 굳이 밖으로 들고 나갈 일도 없으니 집 안에서만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셈이다.

주방에서 의외로 쓰임새가 많을까 싶어서

문득 유튜브에서 다용도 스위스 칼처럼 이것저것 다 할 수 있는 도구가 좋다는 영상을 본 적이 있다. 그래, 차라리 주방에 두고 써보면 어떨까 싶어 싱크대 옆 서랍에 넣어두었다. 사실 우리 집 주방에는 이미 피스카스 가위며 이름 모를 브랜드의 식도들이 즐비하다. 29CM 같은 데서 보면 예쁜 하트 모양 접시나 세련된 도마가 많아서 그런 걸 새로 살까 싶다가도, 결국엔 손에 익은 것만 쓰게 된다. 빅토리녹스를 꺼내어 사과를 깎아보니 생각보다 불편했다. 역시 전용 과도랑은 비교할 게 못 된다. 그런데도 왜 이 작은 칼을 버리지 못하고 자꾸 손이 가는지 모르겠다. 가끔 캔을 따거나 와인 오프너가 필요할 때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대신 이 녀석을 찾게 되는 내 모습이 참 웃기다.

칼 하나에 담긴 괜한 추억들

이 칼을 샀던 게 아마 대학교 때였던가. 그때는 왜 그렇게 카우보이 모자를 쓰고 등산을 가거나, 어디 캠핑이라도 가면 이런 장비가 있어야 진짜 제대로 된 시간을 보내는 거라고 착각했을까. 지금 생각해보면 짐만 되고 번거로웠을 뿐인데 말이다. 같이 등산했던 친구는 어디서 야스리까지 챙겨와서 칼날을 세우고 있었으니 지금 생각하면 참 유난스럽기도 했다. 정작 산 정상에서 컵라면 하나 끓여 먹고 내려오느라 칼을 쓸 일은 거의 없었는데 말이다. 그래도 서랍 속에 박혀 있던 이 녀석을 다시 보니 그 시절의 공기나 햇살 같은 게 잠깐 떠오른다. 물론 그런 감성 때문에 무겁게 이걸 들고 다닐 생각은 이제 전혀 없다.

기능적인 고민과 현실적인 활용

주방 기구들을 정리하다 보니 문득 든 생각인데, 너무 많은 도구가 있으면 오히려 정리가 안 된다. 롯데마트 같은 곳에서 파는 다용도 식기 꽂이나 칼꽂이를 볼 때마다 ‘저거 하나면 깔끔하겠다’ 싶다가도, 막상 사면 또 자리를 차지하는 애물단지가 되곤 한다. 기능과 구조를 보완했다는 신제품들은 늘 솔깃하지만, 결국은 쓰던 칼이랑 가위만 쓴다. 어쩌면 나한테 필요한 건 도구의 개수가 아니라, 그냥 묵묵히 제 자리에서 자기 역할을 하는 물건들인 것 같다. 가끔 배수구 근처에 날파리가 꼬여서 가글을 뿌리거나, LED 랜턴을 챙겨서 다용도실 구석을 비춰보는 사소한 집안일들이 도구들보다 훨씬 더 실질적이다.

다시 서랍으로 돌아가는 시간

결국 고민 끝에 빅토리녹스는 다시 서랍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다. 주방에서 매일 쓰기엔 확실히 불편하고, 그렇다고 등산 갈 일은 더더욱 없으니 말이다. 언젠가 이 녀석이 정말 필요할 때가 올까? 아마도 오지 않을 것 같다. 그래도 그냥 버리기엔 왠지 마음 한구석이 찜찜하다. 이런 게 사람 마음인가 싶다. 5.5 모델이 나왔다며 똑똑해진 AI처럼 세상은 빠르게 변하는데, 내 서랍 속 낡은 칼은 여전히 그 시절의 온도를 간직하고 있는 것 같아서 묘한 기분이 든다. 다음 주에 또 주방 정리를 하다가 이 녀석을 발견하면 그때는 좀 더 냉정해질 수 있을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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