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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향이 좋아 무작정 사 왔던 월넛도마는 결국 플레이팅용 쟁반이 되었다

양재동 골목길 목공방에서 홀린 듯 결제했던 12만 원짜리 월넛도마

지난가을쯤이었을 거다. 양재동 공방 골목을 지나다가 은은하게 풍기는 나무 냄새에 이끌려 어느 작은 목공소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원래는 그냥 근처에 새로 생긴 카페에 가려던 길이었는데, 쇼윈도 안쪽에 진열된 어두운 갈색빛의 나무판들이 왜 그렇게 고급스러워 보였는지 모르겠다. 안으로 들어가니 사장님이 한창 사포질을 하며 나무 도마의 결을 다듬고 계셨다. 나무 수종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유독 색이 짙고 나이테가 멋스럽게 들어간 월넛도마 하나에 꽂혀서 한참을 서성거렸다.

가격을 물어보니 대략 12만 원 선이라고 하셨다. 주방 도마치고는 꽤 비싸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지만, 북미산 호두나무라 단단하고 대대손손 물려 쓸 수 있다는 사장님의 넉살 좋은 설명에 홀리듯 지갑을 열었다. 그날 도마를 사면서 기왕 주방 분위기를 바꾸는 김에 근처 소품숍에서 나무국자랑 실리콘밥주걱 같은 주방 도구들도 몇 개 같이 사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손에 묵직하게 들린 도마 가방을 보며, 나도 이제 요리를 조금 더 멋스럽게 하는 사람이 될 수 있겠다는 실없는 기대감이 들었던 기억이 난다.

대파를 썰어보고 깨달았던 나무 도마 특유의 묵직한 손맛과 소리

집에 오자마자 도마를 주방 한편에 올려두었는데, 확실히 존재감이 달랐다. 회색빛 인조대리석 싱크대 위에 묵직한 월넛 톤이 더해지니 주방 전체가 대단한 요리사의 공간처럼 아늑해진 느낌이었다. 첫날에는 시험 삼아 대파랑 애호박을 썰어보았다. 칼끝이 나무 표면에 닿을 때마다 나던 둔탁하고 묵직한 소리는 정말 마음에 들었다.

기존에 쓰던 얇은 플라스틱 도마에서 나던 딱딱거리는 가볍고 날카로운 마찰음과는 완전히 달랐다. 손목에 전달되는 충격도 덜한 느낌이었고, 칼날이 부드럽게 밀려 들어가는 느낌 자체가 아주 매력적이었다. 대파를 썰고 나니 물기에 젖은 나무 표면에서 특유의 쌉싸름한 나무 향이 은은하게 올라오는데, 요리 과정 자체가 조금 더 여유로워지는 듯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비싼 돈을 주고 나무 도마를 산 보람이 충분하다고 스스로 합리화를 하고 있었다.

김치찌개를 끓이려다 종이호일을 깔며 느끼기 시작한 묘한 번거로움

문제는 그로부터 며칠 뒤, 주말을 맞아 돼지고기 김치찌개를 끓이려고 주방에 섰을 때 시작되었다. 잘 익은 배추김치를 도마 위에 얹으려는 순간 손이 멈칫했다. 이 붉은 김치 국물이 월넛의 멋진 결 속에 스며들어 얼룩이 지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덜컥 들었기 때문이다. 결국 싱크대 서랍을 뒤져 종이호일을 넓게 뜯어 도마 위에 깔고 나서야 겨우 김치를 썰 수 있었다.

김치를 다 썰고 나서 이번에는 생고기를 썰 차례가 되었는데, 또 한 번 고민이 찾아왔다. 고기 핏물이나 기름기가 나무 미세한 틈새로 배어들면 세균이 번식하기 쉽다는 이야기를 어디선가 들은 기억이 났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세제를 잔뜩 묻혀서 빡빡 닦아내자니, 나무 도마는 계면활성제를 흡수했다가 나중에 요리할 때 뱉어낸다는 카더라 통신이 생각나 또 찜찜했다. 결국 뜨거운 물과 베이킹소다를 부어가며 조심조심 씻어내는데, 요리 한번 편하게 하려다가 도마 눈치를 보며 벌벌 떨고 있는 내 모습이 조금 우스꽝스럽게 느껴졌다.

두세 달에 한 번씩 찾아오는 오일 작업과 24시간 동안의 건조 시간

나무 도마의 진짜 까다로운 부분은 정기적인 유지 보수였다. 공방 사장님은 두세 달에 한 번 정도 도마가 건조해질 때 오일을 먹여줘야 수명이 오래가고 갈라지지 않는다고 신신당부하셨다. 귀찮았지만 비싸게 준 물건이니 오래 쓰고 싶어 인터넷에서 도마 전용 미네랄 오일을 검색해 추가로 구매했다.

도마를 깨끗이 씻어 바짝 말린 뒤, 키친타월에 오일을 듬뿍 묻혀 슥슥 바르기 시작했다. 오일을 머금은 월넛의 색감이 다시 짙어지는 모습은 보기 좋았지만, 손에 오일이 묻고 주방 바닥에 흘러내리는 것을 닦아내는 과정은 꽤 번거로웠다. 게다가 오일을 바르고 나면 통풍이 잘되는 그늘진 곳에 세워두고 최소 24시간 동안은 사용하지 말고 말려야 했다. 좁은 주방 싱크대 한쪽을 온종일 차지하고 있는 건조 중인 도마를 피해 밥을 차려 먹으려니 은근히 공간적으로도 성가신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습도가 높은 장마철에는 혹시라도 속에서 곰팡이가 필까 봐 에어컨 바람이 불어오는 거실 쪽에 모셔두기도 했다.

결국 싱크대 틈새에서 다시 꺼내 든 가볍고 투박한 TPU 도마

이런 조심스러운 과정들이 몇 번 반복되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요리를 하려고 칼을 잡을 때 내 손은 자연스럽게 다른 곳을 향하게 되었다. 예전에 사둔 얇고 가벼운 만 원짜리 TPU 도마가 싱크대 옆 좁은 틈새에 꽂혀 있었는데, 결국 그 투박한 녀석을 다시 꺼내 쓰기 시작한 것이다.

TPU 도마는 참 편했다. 김치 국물이 묻든 말든 대충 썰어내고, 고기나 생선을 썰고 나서도 싱크대에서 주방 세제를 펌핑해 수세미로 팍팍 문질러 닦으면 그만이었다. 뜨거운 물을 냅다 부어 소독을 해도 뒤틀릴 걱정이 없고, 설거지 건조대에 대충 툭 걸쳐놓으면 한두 시간 만에 뽀송하게 말랐다. 손목에 전해지는 소리는 확실히 가볍고 딱딱거려 멋은 없었지만, 매일 퇴근하고 피곤한 상태에서 저녁을 차려내야 하는 일상 속에서는 이 간편함이야말로 가장 필요한 덕목이었다. 결국 공들여 관리하던 월넛도마는 주방 싱크대 위에서 진짜 ‘요리’를 하는 용도보다는, 손님이 왔을 때 빵을 썰어 올리거나 치즈와 크래커를 얹어내는 플레이팅용 쟁반 역할로 밀려나게 되었다.

주방 한구석에서 플레이팅용 쟁반으로 변해버린 무거운 오브제를 보며

지금도 우리 집 주방 조리대 한쪽 벽면에는 짙은 갈색의 월넛도마가 꼿꼿하게 서 있다. 가끔 주방을 정리하면서 손으로 표면을 쓸어보면, 오일이 다 빠져서 처음 샀을 때보다 조금은 까칠해진 감촉이 느껴진다. 다시 기름을 바르고 말려야지 하면서도 귀찮음에 매번 주말 미루듯 미루고만 있다.

확실히 멋지고 이쁘긴 하지만, 나와 같은 게으른 성격을 가진 사람에게 나무 도마는 조금 과한 욕심이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매일 삼시 세끼 한식을 해 먹으며 마늘을 찧고 파를 썰고 김치를 다져야 하는 평범한 집 밥의 세계에서, 나무 도마는 너무 많은 배려를 요구한다. 버리기엔 너무 아깝고, 그렇다고 다시 매일매일의 메인 도마로 쓰기엔 내 인내심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매번 주방 불을 끌 때마다 깨닫는다. 조만간 주말에 시간이 나면 귀찮은 오일 칠이나 한 번 더 해줘야겠다고 생각만 하며, 오늘도 나는 그냥 얇은 TPU 도마 위에서 저녁 찬거리를 썬다.

“나무 향이 좋아 무작정 사 왔던 월넛도마는 결국 플레이팅용 쟁반이 되었다”에 대한 4개의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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