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두나무 도마가 예뻐 보이던 날
며칠 전부터 주방 분위기를 좀 바꿔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괜히 식탁 위에 올라와 있는 낡은 플라스틱 도마가 눈에 거슬리기 시작한 거다. 처음엔 그냥 가볍게 구경이나 하려고 들어간 주방용품점에는 눈을 뗄 수 없는 물건들이 정말 많았다. 특히 호두나무 도마라고 적힌 묵직한 것들이 자꾸 눈에 들어왔는데, 가격대는 대략 8만 원에서 12만 원 사이였다. 사실 예전에 쓰던 저렴한 실리콘 도마는 1만 원대면 충분했는데, 갑자기 이 정도 돈을 쓰는 게 맞나 싶어 한참을 들었다 놨다 했다.
같이 있던 실리콘 조리도구 세트나 머핀틀도 예뻐 보였지만, 지금 당장 필요한 건 결국 도마였다. 식당 도마처럼 투박한 느낌보다는 좀 정갈한 게 갖고 싶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매장 직원분은 나무 도마가 관리가 까다롭다고 몇 번이나 강조했지만, 그 당시에는 ‘잘 닦고 말리면 되지’라는 안일한 생각뿐이었다. 결국 무거운 호두나무 도마 하나를 덜컥 결제하고 말았다. 집에 가져오니 생각보다 더 묵직해서, 이걸 매일 어떻게 씻어서 말려야 할지 갑자기 막막해지기 시작했다.
집으로 가져온 뒤의 현실적인 고민
막상 주방에 두고 보니 확실히 분위기는 살았다. 불고기판이랑 도자기 접시 옆에 두니 꽤 그럴듯한 그림이 나왔다. 하지만 문제는 그 다음부터였다. 퇴근하고 집에 와서 저녁을 먹고 나면 도마를 세척하는 일이 일종의 숙제처럼 느껴진다. 나무라 물기를 빨리 제거하지 않으면 곰팡이가 생길까 봐 불안해서, 설거지를 마치면 마른 행주로 닦고 또 통풍이 잘되는 곳에 세워두느라 진땀을 뺀다. 처음 샀을 때의 그 즐거움은 어디 가고, 이제는 도마 상태를 살피는 게 일상이 되어버렸다.
어떤 날은 너무 피곤해서 대충 물기만 닦고 엎어놨더니 다음 날 아침에 괜히 찜찜한 기분이 들었다. 예전에 쓰던 실리콘 제품은 그냥 식기세척기에 넣고 돌리면 끝이었는데, 이건 왜 이렇게 손이 많이 가는지 모르겠다. 간식 트레이로 쓰면 예쁠 것 같아서 산 건데, 실제로 음식을 올려두고 사진을 찍는 것보다 도마 본연의 기능으로 쓰는 시간이 훨씬 많다 보니 금방 칼자국이 나는 것도 속상하다. 나무 조리도구들도 같이 샀는데, 역시나 이것들도 기름칠을 주기적으로 해줘야 한다는 사실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생각보다 더 불편한 주방 환경
가끔은 내가 왜 이렇게까지 불편을 감수하며 살림을 늘리나 싶을 때가 있다. 아산시에서 하는 체험 학습 프로그램 안내를 보다가 ‘도마 위에 춤추는 꽃과 글’이라는 문구를 발견했는데, 갑자기 왠지 모를 동질감이 느껴졌다. 사람들은 도마를 참 여러 가지 의미로 쓰나 보다. 뉴스에서 보니까 어디는 그린수소 사업 문제로 도마에 오르고, 또 어디는 선관위 예산 문제로 도마에 오르던데. 나의 이 좁은 주방 속 나무 도마도 매일같이 나의 관리 소홀 때문에 내 스스로의 심판대 위에 오르는 건 아닌가 하는 엉뚱한 생각도 든다.
사실 따지고 보면 도마 하나 바꾼다고 요리 실력이 느는 것도 아니고, 주방이 엄청나게 깔끔해지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신경 써야 할 도구만 하나 늘어난 셈이다. 상수원 보호구역에서 친환경 농법으로 쌀을 키우는 마을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도 좀 더 건강한 식재료를 쓰기 위해 이런 도구를 산 거라 스스로 위안을 삼아본다. 그런데 가끔은 그냥 다 귀찮아서 예전에 쓰던 투명한 플라스틱 도마가 그리울 때가 있다. 그건 그냥 아무 데나 툭 던져놔도 마음이 편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쓰게 되는 이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나는 이 호두나무 도마를 매일 꺼낸다. 이유는 딱히 없다. 그냥 나무가 주는 그 따뜻한 느낌이 좋아서인 것 같다. 도자기 접시에 담긴 반찬을 도마 위에 올리고 식탁으로 옮길 때마다 느껴지는 그 묵직한 안정감이, 불편함을 조금은 덮어주는 것 같다. 물론 주말마다 오일링을 해야 한다는 사실은 여전히 나를 괴롭히지만 말이다. 언젠가 오일을 바르다가 이게 무슨 사서 고생인가 싶어 멈칫한 적도 있다.
도마가 춤추는 꽃과 글을 담는 예술 작품이 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내가 오늘 저녁을 준비하는 시간만큼은 나만의 작은 의식을 치르는 기분이 들게 해준다. 어쩌면 도마 관리의 불편함은 내 일상의 속도를 억지로라도 늦추기 위한 작은 장치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그냥 단순히 예쁜 물건에 집착하는 내 습관일 수도 있겠지. 앞으로 이 도마가 얼마나 더 버텨줄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칼자국이 조금 더 깊어질 때까지는 계속 써볼 생각이다. 오늘 저녁에는 또 무엇을 올려서 먹을까. 나무 도마를 보면 왠지 더 정갈한 음식을 올려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오늘도 괜히 채소를 한 번 더 다듬게 된다.

나무 도마가 주는 정갈한 느낌이 정말 매력적이네요. 묵직한 무게가 좀 부담스럽기도 하지만, 뭔가 더 오래 사용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